나의 이야기

공주시 공산성 탐방

율길 2010. 3. 15. 20:26

공주시 공산성 탐방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오전 10시 35분 우등 버스 편으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하여 충남 공주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지리를 잘 몰라 터미널에서 택시로 공산성 매표소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니 바로 금강을 건너니 산성이 보인다.

산성 주차장 맞은편 「고마나루 돌 쌈밥집」에서 돌 쌈밥(수육이 나오면 12,000원, 수육없이 쌈밥만은 10,000원) 으로 점심을 먹고 산성에 올라갔다. (입장료는 성인 800원 경로는 무료) 금서루(서문)을 지나 정상 쌍수정까지는 힘들지 않는 길이었다.

내가 공산성을 찾은 이유는 쌍수정을 보고, 공주산성 쌍수정 주필사적비를 보기 위해서다. 조선조 인조가 이괄의 안을 피해 공주까지 몽진하여 6일간이나 공주산성 쌍수에 몸을 기대고 나라를 걱정하다가 이괄과 한명연의 목을 가지고와 반란군을 평정했다는 보고를 받고, 쌍수(雙樹)에 통훈대부라는 령을 내렸다는 유래가 있다. 후에 그 곳에다 정자를 지어 쌍수정이라 이름 짓고, 밑에는 사적을 기록한 사적비를 세워 지금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다음은 사적비 비문의 원문과 번역문이다.

 

公州山城 雙樹亭 駐蹕事蹟碑

有明朝鮮國公州山城雙樹亭紀蹟碑

恭惟 主上殿下卽位之二年 賊臣适明璉等 殺使稱兵反 連陷州郡 官軍佐次初劒 于黃鳳再挫于猪灘 開城失守 臨湍師潰於是都下大駴 上乃定南狩計 二月壬辰奉 廟社主出駐振威縣而賊入京師 擁興安君瑅爲亂 元帥張晩督諸將 迫城大戰克賊賊 猶挾瑅逸捷書 雖奏而俘馘未達 車駕以丁酉入公州湖南勤 王之帥畢集咸奮憤鼓勇軍容盛張 翌日 上帶劍 乘馬幸山城 御雙樹亭 進領議政臣李元翼 右議政臣申欽 兵曹判書臣金瑬于前弁方數雉考崇庳秩夷難又 召巡察使臣李命俊 咨以城守之策 俄而适明璉頭傳詣 行在都體察使李元翼 兵曹判書金瑬 露布 聞獻馘禮成 上以戎服親告 宗廟誕告八方 肆宥封內仍 召巡察使臣李命俊 牧使宋興周 躬勞備至弁錫秩閱湖中文武士取于若干人 凡所以獎礪者 靡不擧用是月壬寅班師焉 巡察使與牧使治石于雙樹亭下 徼欽紀之曰 乘輿播越下邑是仗 玉趾儼然臨于荒丘命俊 等 竊乘時會獲霑 恩澤榮輝今古侈詡邦域者蓋圖不朽 嘻噫 在昔載績揚功自賢當時論著誇大竪樹豊窿者何限獨可稱述廑廑數代周宣征戎而銘鼓唐宗攘狄而勒石夫獹狁之猾夏 頡利之渝盟猶爲細故 此關得失而無關於存亡之數也 惟适明璉俱以戎首 驅防虜之師肆射天之凶亂逆之變 羅麗以還所稀觀而 國史所絶書者則與周唐之事不可槩而 王靈敷鬯將士戮力收功於旬月之間 膏磔卽旣極神人 稱慶掃淸匡復之勳又非周唐所可槩也 二公之圖不朽者惡可己哉 公山卽湖甸一都會也 車嶺綰轂南北而錦水爲帶 雙樹之亭尤據形勝城(域)中變作則爲保障而實用武之國也 唐摠管薛仁貴 討平百濟躍武于玆土云 萬曆壬寅年間 宗伯西坰柳公根出爲都巡察使 始築此城規設頗備癸亥巡察使申鑑 重新其制蓄積繕修是役也 今牧使宋公以屬吏尸之不擇寒暑燥濕僝工寔遄未逾歲而爲 駐蹕之所至 勞臨觀致無竟之烈爲孚吉之地 宋公亦受委殫忠卒膺上賞玆非天之定數而適自然之符者歟 城之東南舊有井而水淺 駕至之後井水自溢 城下江灘亦無雨而漲 人謂之祥尤可異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申 欽 撰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致仕 奉朝賀 南九萬 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崔錫鼎 篆

 

 

 

공주산성 쌍수정 주필 사적비

유명조선국공주산성쌍수정기적비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인조)께서 즉위하신지 2년(서기1624년) 만에 적신 이괄과 한명연 등이 조정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를 죽이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의 주군(州郡)들이 연달아 적도들에게 함락되었다.

(註 = 이괄이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2등으로 책정된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조정에서 이괄의 아들 이진이 반역을 모의했다는 정보에 의하여 이진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기 위하여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사자로 파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괄은 만약에 이진이 체포되어 압송될 경우 이괄도 반역죄로 참형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사자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관군은 숫자적으로 열세에 있어 처음에는 황주와 봉산에서 패하고 두 번째로는 저탄에서 좌절되어 개성을 지키지 못하였고 임진과 장단이 차례로 무너지니 도하의 백성들이 크게 놀랐다.

주상께서는 이에 남으로 몽진하기로 계책을 정하고 2월 11일 임진일에 종묘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남천하여 평택군 진위현에 머물렀다.

이때 적이 서울에 입성하여 흥안군 제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註 = 흥안군 제(瑅)는 선조대왕의 열째아들로 성품이 호방하고 활달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고 이괄과 내통하며 역모에 동조하였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괄의 진중으로 들어가 서울에 입성한 후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관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소천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관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도원수 장만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 성밖에 진을 치고 대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고 흥안군을 체포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도망 하였다.

승전보를 상주하였으나 부괵(俘馘·적군을 죽이고 절취한 귀 또는 머리)은 도달하지 아니하였다. 어가가 2월 16일 정유일에 공주에 입성하니 호남의 근왕병들이 모두 모여 분격하니 그 용맹스러운 기세가 충천하였다.

다음날에 주상께서 칼을 차고 말을 타고 공주산성 쌍수정에 오르시니 영의정 이원익 우의정 신흠 병조판서 김류 등이 어전에 나아가 4방이 안정되고 전국이 평정되고 있음을 상고하고 또 순찰사 이명준을 불러 도성(공주산성)을 수비할 계책을 숙의하였다.

갑자기 적장 이괄과 한명연의 수급이 행재소에 도착하니 도체찰사 이원익 병조판서 김류가 전승소식을 듣고 적장의 수급을 바치는 전승기념 헌괵례(獻馘禮)를 행하고 주상이 군복차림으로 종묘의 열성조에게 반란이 평정되었음을 친히 고하고 전국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인하여 순찰사 이명준 목사 송흥주를 부르니 몸소 갖추어 이르고 변석질이 호중에서 문·무사들을 검열하고 약간인을 취(取)하였으니 이는 문·무를 장려하는 바로 가히 거용(擧用)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달 21일 임인(壬寅)일에 군사를 거두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순찰사가 목사와 더불어 돌을 다듬어 쌍수정 아래에 신흠이 순행사실을 기록하여 이르기를 전하의 어가가 남천(南遷)하여 지방의 작은 도읍에 머무르시니 주상의 행적이 엄연하였다. 황구에 임하여서는 이준명이 시회에 편승하여 은택을 얻었으니 고금의 영화가 전국에 자랑 할 만하여 영구히 보전하기를 도모함이다. 아아- 옛적에 재적이 공명으로 이름을 날려 스스로 현인이라 하여 당시의 논저가 과대하기는 하였으나 수수풍융한 것이니 어찌 기한이 있으리오. 홀로 칭술하여 근근히 수대에 이르렀다.

주나라 선왕이 서융을 친 사실을 북을 울려 마음에 새기고 당태종이 적의 침입을 격퇴한 사실을 돌에 새겨 기렸다.

무릇 흉노족이 중국을 어지럽게 한 사실과 국익을 위해 약속을 어기는 일은 다 작은 일이다. 이는 득실에 관계될 뿐 존망에는 무관하다는 이치이다. 오직 이괄과 한명연은 함께 적의 수귀로써 쫓아 방어하고 포로로 잡아 효시(梟示) 하는 것은 천하의 흉변이요 난역의 변고다. 신라와 고려에 이르도록 보기 드문 변란으로 국사의 단절이다.

사관이 주나라와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되 대략하지는 않는 것이다. 왕권의 위덕으로도 장수를 죽이고 공을 거두는 것은 순월지간이요 책형(磔刑· 찢어 죽이는 형벌)은 마지막이다. 신인의 칭경으로 소청광복의 공과 또한 주나라와 당나라의 일도 대략하지는 않는 것이다.

2공이 영원히 보존하고자 도모하는 것을 어찌 옳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공산은 곧 호남의 하나에 도회다. 차령은 남북으로 통괄하고 금강은 띠가 되고 쌍수의 정자는 더욱 경승지로 성중을 변모하게 하였으니 곧 나라에서 실용적 무를 보장하는 것이다.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백제를 토평하므로 무력이 뛰어나다고 한 곳이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만력 임인년(서기1602년)간에 종백(예부상서) 서경 유공 근이 도순찰사로 나가게 되어 처음으로 이 성을 쌓고 훌륭하게 규모를 갖추었다.

계해년(1623)에 순찰사 신감이 새롭게 중수하고 단장을 하였으니 이 역사는 현재의 목사 송흥주공이 이시(吏尸)에게 책임을 맡겨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날씨를 가리지 아니하고 공기를 빠르게 나타내어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마쳤으니 주상께서 몽진하여 머무는 장소가 될수 있게되어 그 노고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공열을 다 마치지 못했다면 주필(임금이 몽진하여 머무는 곳)의 명소가 될 수가 있었겠는가 송공이 또 임무를 위임받고 충성을 다해 마침내 주상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니 이는 하늘의 운수가 아니요 능력을 갖춘 적임자 이었기 때문이다.

공주성의 동남쪽에 예적에 우물이 하나 있었으나 물이 말라 사용하지 못하던 것이 왕이 이른 후에 우물에 물이 넘치게 되었고 성 아래 금강의 물도 비가 오지 아니하였는데 강물이 창일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상서로운 일이라 하고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신   흠  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남구만  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최석정  전

성균관 유도회 부회장  홍 재 덕  역 

 

有名朝鮮國 公州山城 雙樹山亭 紀蹟碑

古之平內亂者有不欲張[皇]其武略盖平亂之功小而致亂之恥大也曹魏趙宋之臣其意盖如此爾今象村申公設(記)雙樹亭事則侈矣而愚以爲懲毖之意實在乎其中也盖當是時朝廷所以處适者旣失其宜而又适之意以爲邦國之無人可以叱咤而得志故敢生射天之謀終致乘輿播越廟社播(蒼)黃然當日生民新自膏火中出來感戴承恩故能戮力致討凶渠授首不然則殆矣申公之記之也豈不欲上下無忘在莒而愛民恤軍任賢使能以措國勢於盤石之安哉然自是中外大小之議皆以爲當時之亂實治兵任將之致而不思木朽忠生之故一爲諱兵之謀恬嬉姑息無復猶爲愚每以爲當時不忘雙樹之日則必無丁卯之亂矣其後不忘江都之厄則必無丙子之事矣丙子之後于今三十餘年則未知朝廷不忘南漢之辱否乎噫嘻宴安之樂眞鴆毒也哉今觀察使閔公維重每以治事之暇登臺瞻眺想像當時而慨然興懷遂伐石鳩工鐫揭象村之文其以當日之功爲恥而有意於懲毖也甚(深)矣遂嘉其意而書其石陰如此云

時 崇禎 著雍 㳻灘 長至日 恩津 宋時烈 記

戊子 七月 日 豊城 趙相愚 書

 

유명조선국 공주산성 쌍수정 기적비

옛날에 평시와 내란이 있을 경우 무략을 장황하게 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대개 난을 평정한 공은 적고 치난의 부끄러움은 큰 것이기 때문이다. 조위조송의 신하들의 뜻도 대개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상촌 신공 흠이 쌍수정에 일을 기록한 것은 사치한 어리석음이라 하겠으나 전에 과오를 뉘우치고 삼가고자 하는 뜻의 진실이 그 중에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조정에서는 이괄의 난을 당하여 이미 그 정도를 일었고 또 이괄의 뜻대로 되어 나라에는 질타하는 사람도 없어 득의가 만만한 고로 감히 주상을 욕되게 하는 꾀를 내어 마침내 임금이 몽진을 하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기에 창황하였으니 당시의 민생이 그러하였다

기름 불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온 것 같이 성은에 감읍하고 죽기로 힘을 다해 토벌하여 흉적의 우두머리의 수급을 베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신공의 기록이니 어찌 상하가 하고자 하지 아니 하겠는가 국난을 당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군졸을 긍휼이 하는 소임을 현명하게 잘하는 것이 국세를 반석위에 편안케 하는 조치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중외와 대소사를 의논하여 다 당시의 반란에 실제로 병졸들을 다스리는 장수의 소임에 이르러서 나무도 썩고 병충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 연고이다.

한번 병졸들의 도모함을 꺼리게 되면 무사안일의 생각이 고식화 되어 다시는 도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어리석은 일이다. 매양 당시에 쌍수의 일을 잊지 아니 하였다면 반드시 정묘의 난은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강도의 액을 잊지 아니 하였다면 반드시 병자의 난은 없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현재까지 30여년이 되어 조정에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슬프다 연회의 즐거움은 참으로 무서운 독이 되는 것이다. 이제 관찰사 민공 유중이 매양 정사의 바쁜 틈을 내어 쌍수정에 올라 조망하며 당시를 상상하며 개연히 분발하여 드디어 석공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게 하고 상촌공의 글을 새기게 하여 그 당시의 공을 부끄러워하고 증비에 유의하게 하였다. 드디어 그 아름다운 뜻을 글로써 돌에 새겨 이와 같이 이르노라

 

숭정 저옹 석탄(무신·서기1668년) 장지일 은진 송시열 기

성균관 유도회 부회장 덕천 홍재덕 역

 

 雙樹亭 駐蹕事蹟碑 追記

在昔天啓4年甲子立(之)春逆臣犯順仁祖大王南巡狩乘輿在道而捷書奏上至公州臨山城御雙樹亭而獻猷(馘)至其時觀察使臣李命俊牧使臣宋興周請碑文于右議政申欽上贊國家討除逆亂之功烈下彰玆地依被天光之榮幸而顯刻未及成其後四十餘年觀察使臣閔維重旣(治)石將載辭而且未之果又過四十餘年今觀察使臣李善溥念駐蹕之己遠慨遺跡之將堙於是乎取前俱之石鑱舊撰之文樹之亭下用昭示于久遠噫甲子至今日八十有五年矣李觀察乃能修擧未遑以藏玆事籍曰玆非朝家頒布敎條於方面考課其功能者然繹思戎功揭(揚)厲(揚萬)鴻休於戱前王不忘亦豈(非)藩維之臣承流宣化順長道屈君醜之大端也九萬旣書碑文且附記碑事首尾于左

 

戊子 7月 日 豊城 趙相愚 書

崇禎紀元後 81年 戊子 9月 日 立

 

쌍수정 주필사적비 추기

옛날 천계사년 갑자(서기1624) 봄에 역신이 반역하여 인조대왕이 남으로 몽진하였다. 어가가 도중에 있을 때 승전 보고를 상주하였다. 공주 산성에 임하여 쌍수정에서 주상에게 적장의 수급을 드렸다. 그때에 이르러 관찰사 이준명과 목사 송흥주가 우의정 신흠에게 비문을 청하여 위로는 국가에서 반란군을 토벌한 공열을 찬양하고 아래로는 이곳 공주 땅에 국왕이 머무는 은택을 입은 영광을 새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그 후 40여 년 만에 관찰사 민유중이 이미 그 사적을 돌에 새기고도 또 이루지 못하였고 또 40여년이 지나 현재의 관찰사 이선부가 주필의 일을 생각하니 이미 오래되어 그 유적이 장차 인멸될 것을 개탄하여 이에 전의 비석을 찾아내어 옛 비문을 새겨 쌍수정 아래에 밝게 보이고자 하였으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안타깝다.

갑자년(서기1624년)으로부터 현재까지는 85년이니 이관찰사가 이미 다 준비는 하였으나 이루지는 못하였으니 보존되어 오는 사적에 의하면 이는 조정의 반포한 교조의 내용에 그 공이 훌륭한 자를 상고하고 큰 공적을 생각하여 대통을 고양하니 아 - 전왕을 잊지 않음이다. 또 어찌하여 제후의 신하로써 선정을 이어받고 길이 순종하고 거두어 다스리는 것이 대의가 될 것이다. 남구만이 이미 써놓은 비문에 부기하여 비석을 세우게 된 사유를 비문말미에 기록하노라.

숭정 기원후 81년 무자(서기 1708년)

7월 일 풍성 조상우 서

9월 일 세움

성균관유도회 부회장 덕천 홍재덕 역

                                            -碑文 鎭川人 公州公(宋興周)13세손 松巖 봉규(奉圭)씨 제공-                                                                    

 

 금서루 (서문)

 쌍수정 사적비각, 뒤에 쌍수정이 보인다.

  쌍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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