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노트 08. (2020.03.15.)
易序
易之爲書-卦爻彖象之義-備而天地萬物之情이 見하니 聖人之憂天下來世-其至矣라 先天下而開其物하고 後天下而成其務하니 是故로 極其數하야 以定天下之象하고 著其象하야 以定天下之吉凶하니 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난 皆所以順性命之理하고 盡變化之道也라.散之在理則有萬殊하고 統之在道則无二致하니 所以易有太極에 是生兩儀하니 太極者난 道也오 兩儀者난 陰陽也니 陰陽은 一道也오 太極은 无極也라.萬物之生이 負陰而抱陽하야 莫不有太極하고 莫不有兩儀하야 絪縕交感에 變化不窮하야 形一受其生하고 神一發其智하야 情僞出焉하고 萬緖起焉하니 易은 所以定吉凶而生大業이라 故로 易者난 陰陽之道也오 卦者난 陰陽之物也오 爻者난 陰陽之動也니 卦雖不同이나 所同者난 奇偶오 爻雖不同이나 所同者난 九六이라 是以로 六十四卦-爲其體하고 三百八十四爻-互爲其用하야 遠在六合之外하고 近在一身之中하며 暫於瞬息하고 微於動靜하야 莫不有卦之象焉하고 莫不有爻之義焉하니 至栽라 易乎여 其道至大而无不包하고 其用이 至神而无不存하니 時固未始有一이라 而卦未始有定象하고 事固未始有窮이라 而爻亦未始有定位하니 以一時而索卦하면 則拘於无變하니 非易也오 以一事而明爻하야 則窒而不通이니 非易也라 知所謂卦爻彖象之義하고 而不知有卦爻彖象之用이면 亦非易也라 故로 得之於精神之運-心術之動하야 與天地合其德하고 與日月合其明하고 與四時合其序하고 與鬼神合其吉凶이니 然後에 可以謂之知易也라 雖然이나 易之有卦난 易之已形者也오 卦之有爻난 卦之已見者也니 已形已見者난 可以言知어니와 未形未見者난 不可以名求니 則所謂易者난 果何如哉아 此난 學者-所當知也니라.
易의 書됨은 卦·爻·彖·象의 뜻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天地 만물의 情을 드러낸다. 聖人이 천하 來世를 근심하심이 그 지극하다. 천하를 먼저 하여 사물을 열고, 천하를 뒤에 하여 그 힘쓸 것을 이루게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그 數를 극진히 하여 그로써 천하의 象을 定했으며, 그 象을 드러내어서 그로써 천하의 吉凶을 定했으니 64卦와 384爻가 모두 性命의 이치를 따르게 하여 변화의 道理를 다한 것이다. 이것을 흩어서 이치 있게 하면 만 가지로 다름이 있고, 이것을 통괄하여 道에 있게 하면 둘을 이루는 것이 없다. 소이 易에는 太極이 있어 이것이 兩儀을 낳았다. 太極은 道이며, 兩儀는 陰陽이다. 陰陽은 하나의 道이다. 太極은 無極이다. 만물이 발생하는 것이 陰은 등지고 陽은 안아서 太極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兩儀가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 변화가 다함이 없다. 형체는 한 번 그 生을 받고 神 은 그 지혜를 한 번 發하여 참과 거짓을 냈으니 만 가지 실마리가 일어난다. 易에는 소이 吉凶을 定하여 큰 業을 生한다. 그러므로 易은 陰陽의 道이요, 卦는 陰陽의 物이며 爻는 陰陽의 動함이다. 괘는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같은 바는 寄寓며 爻는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같은 바는 九六이다. 이로써 64괘는 그 체가 되고 384爻는 서로 그 쓰임이 되어 멀리는 六合(우주)의 밖에 있고, 가까이는 자신의 한 몸 가운데 있어서 잠시인 순식간에도 極微한 動靜에도 괘의 象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극하도다. 易이여! 그 道는 지극회 커서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쓰임이 지극히 신묘하여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때는 진실로 처음부터 하나에 있지 않고, 괘는 처음부터 定한 象이 있지 않으며, 일은 진실로 처음부터 窮하지 않으니 爻역시 처음부터 定한 位가 없다. 한 때로써 괘를 찾는다면 변화가 없는데 구애되니 易이 아니면, 하나의 일로써 爻를 밝히면 막혀서 통하지 않으니 易이 아니다. 이른바 卦·爻 ·彖·象의 뜻을 알지만 卦·爻 ·彖·象의 쓰임을 알고 있지 않다면 역시 易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의 운용과 心術의 動함을 얻어 천지와 더불어 그 德을 합하고, 日月과 더불어 그 次序를 합하며, 鬼神과 더불어 그 吉凶을 합한 연후에야 그로써 가히 易을 안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易은 괘가 있고 易은 이미 形이 있는 것이며, 괘는 爻가 있어 卦를 이미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形이 있어 이미 볼 수 있는 것은 그로써 가히 이름을 구할 수 없다. 이른바 易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배우는 者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다.
易傳序
易은 變易也니 隨時變易하야 以從道也니라. 其爲書也-廣大悉備하야 將以順性命之理하며 通幽明之故하며 盡事物之情하야 而示開物成務之道也니 聖人之憂患後世-可謂至矣신저라. 去古雖遠이나 遺經尙存이라호대 然而前儒는 失意以傳言하고 後學은 誦言而忘味하니 自秦而下로 蓋无傳矣라. 予生千載之後하야 悼斯文之湮晦하야 將俾後人으로 沿流而求源하노니 此는 傳所以作也니라. 易有聖人-난 之道四焉하니 以言者尙其辭하고 以動者尙其變하고 以制器者尙其象하고 以卜筮者- 尙其占하니 吉凶消長之理와 進退存亡之道-備於辭하니 推辭考卦하면 可以知變이오.象與占은 在其中矣라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하고 동칙관其變而玩其占하나니 得於辭요대 不達其意者난 有矣어니와 未有不得於辭而能通其意者也라.至微者는 理也오 至著者는 象也니 體用一源이오. 顯微无間이니 觀會通하야 以行其典禮하면 則辭无所不備니라. 故로 善學者-求言을 必自近하나니 易於近者는 非知言者也라. 予所傳者는 辭也니 由辭以得其意는 則在乎人焉이니라.
有宋元符二年-己卯正月庚申에 河南程頤正叔序하노라.
역은 변하고 비뀌는 것이다. 때를 따라 변하고 바뀌니 그로써 道를 좇는 것이다. 그 書됨이 넓고 커서 다 갖추어 졌으니 장차 性命의 이치응 따르며, 靈明의 연고를 통하여 事物의 情을 다하고 物을 이루어 힘쓰는 道를 열어 보이는 것이니 聖人이 後世를 걱정하심이 가히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엣것을 버린지가 비록 멀다 하더라도 經을 남긴 것이 오히려 있다. 그러나 前儒(대개 曾子 이전을 말 함)는 뜻을 잃음으로써 말만 傳하고 後學은 말만 외우고 있었으니 秦 나라로부터 이하는 대게 전하는 것이 없다. 내가 千年의 뒤에 나서 이 글이 煙晦될 것을 슬퍼하여 장차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 흐름을 따라서 根源을 求하니 이것이 傳을 지은 까닭이다. 易에는 聖人의 道가 넷이 있으니 이로써 말을 하는 者는 그 말(辭)을 숭상하고, 이로써 움직이는 者는 그 변화를 숭상하고, 이로써 器具를 만드는 者는 象을 숭상하며, 占을 치는 者는 그 占을 숭상하니, 吉凶과 消長의 차이와 進退存亡의 道가 辭에 잦추어졌으니 辭를 미루어 卦를 상고하면 그로써 변화를 알 수 있을 것이니 象과 占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君子가 居하면 그 象을 살펴보고 그 말을 완색하고, 動하면 그 변화를 살펴보아 그 占을 완색한다. 그 말을 얻었으나 그 뜻에 이르지 못하는 者가 있다. 말을 얻지 못하고 그 뜻에 통할 수 있는 者는 아직 있지 않다. 지극히 微한 것은 이치요, 지극히 들어나는 것은 象이니 體와 用이 한 근원이라 顯微는 사이가 없다. 모이고 통하는 것을 살펴보아 그로써 그 典禮를 행하면 말이 갖추어지지 않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잘 배우는 자는 말을 구하기가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할 것이며, 가까운 것을 소흘이 하는 자는 말을 아는 者가 아니다. 내가 傳을 한 것은 말이다. 말로 말미암아 그로써 뚯울 얻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있다.
宋元符 二年 己卯 正月 庚申
河南 程頤正叔은 序하노라
※이것은 本意를 제외한 傳에 대한 서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