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춘추좌씨전 서문 해석

율길 2015. 10. 14. 19:49

春秋左氏傳 序文 解釋

 

春秋者 魯史記之名也記事者 以事繫日하고 以日繫月하며 以月繫時하고 以時繫年하니 所以紀遠近하고 別同異也 故 史之所記必表年以首事 年有四時故 錯擧以爲所記之名也

 

춘추는 노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 이름이다. 나라 일을 기록 하는 자는 그 사건이 있는 날에 연계시켜 기록하고, 그 날이 속하는 달을 따져 붙이며, 그 달을 時節에 맞추어 따지고, 그 시 절이 어느 해인가에 연계시키니, 年月의 멀고 가까움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일의 같고 다름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사관이 기록한 바는, 반드시 군주의 재위 몇 해인가 표기하여 그 해의 記事를 시작했다. 한 해에는 春夏秋冬四季節이 있다. 그러므로 사계절의 이름 중 에서 하나씩을 걸러 빼고, 그 나머지를 위 아래로 붙이어서 기록한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周禮有史官하야 掌邦國四方之事하고 達四方之志하며 諸侯亦各有國史하야 大事書之於策하고 小事簡牘而已니라 孟子曰 楚謂之檮杌하고 晉謂之乘하고 而魯謂之春秋라하니 其實一也 韓宣子適魯하야 見易象與魯春秋하고 曰周禮盡在魯矣오녀 吾乃今知周公之德與周之所以王이라하니 韓子所見 盖周之舊典禮經也

 

周禮에 사관에 대한 말이 있다. 나라 사방의 일을 기록하고, 사방에 알릴 뜻을 소통함을 맡은 것이다. 제후에게 각자 國史가 있어 큰일은 대나무를 깍아 만든 것에 기록하고, 작은 일은 대 나무를 깍아 만든 패의 작은 것 또는 큰 것에다 기록할 따름이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에서는 檮杌이라하고, 에서는 이걸 이라 하고, 에서는 春秋라 하니, 실은 다 國史인 것이다.라고 했다. 한선자가 에 가서 역경의 풀이와 의 춘추를 보고는 나라의 예 법이 모두 노나라에 있구나! 내 이제야 周公의 덕과 周文王이 왕이 된 까닭을 알겠도다!라 고 말했다. 한선자 가 본 것은 아마도 주나라의 옛날에 제정한 사관의 기록법과 예법의 근본 이 춘추에 나타나 있는 점이었을 것이다.

 

周德旣衰 官失其守하야 上之人不能使春秋昭明하야 赴告策書諸所記注 多違舊章이라 仲尼因魯史策書成文하야 考其眞僞而志其典禮하니 上以遵周公之遺制하시고 下以明將來之法하시다 其敎之所存 文之所害 則刊而正之하야 以示勸戒하시고 其餘則皆卽用舊史하니 史有文質하고 辭有詳略하야 不必改也 故傳曰 其善志라하고 又曰 非聖人이면 孰能脩之리오

 

주나라의 덕이 쇠해짐에 관리는 자기가 지켜야 할 기강을 잃어서, 위에 있는 군주가 춘추의 정신(褒貶,勸善懲惡)을 밝게 할 수가 없어서, 다른 나라에 알리는 문서나 여러 가지 기록하고 설명한 것이, 거의 옛날의 법도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仲尼께서는 史官에다 써서 成文化된 옛 글에 의해서, 그 참되고 거짓됨을 上考하시어, 옛날의 법식과 예법을 밝히셨으 니. 위로는 주공이 정해서 전해진 법식을 따르고, 아래로는 앞으로 지켜야 할 법식을 명백히 하셨다. 의 글에서 世人에게 교훈하는 것은 보존함과, 뜻을 해치는 대목은 깍아 내고 正立 하여 이로써 착함을 권장하고 악함을 경계함을 보이시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의 역사 글을 그대로 이용했다. 사관의 글에는 살붙인 곳이 있고, 글에는 자세한 곳과 간략하게 된 곳도 있 으나 교훈이 되는 거라면 고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좌씨의 전에는 좋은 기록이다라고 했 다. 또 말하길 聖人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런 것을 編修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盖周公之志 仲尼從而明之하시니 左丘明受經於仲尼하야 以爲經者不刊之書也 故 傳或先經以始事하고 或後經以終義하며 或依經以辯理하고 或錯經以合異하며 隨義以發其例之所重하고 舊史遺文 略不盡擧하니 非聖人所脩之要故也 身爲國史하야 躬覽載籍하니 必廣記而備言之하야 其文緩하고 其旨遠이라 將令學者元始要終하고 尋其枝葉하야 究其所窮하고 優而柔之하야 使自求之 饜而飫之하야 使自趍之하니 若江海之浸하고 膏澤之潤하며 渙然氷釋하고 怡然理順하야 然後爲得也

 

 

주공의 덕을 중니께서 그것을 따라 밝히심이시니 좌구명은 경문을 중니께 전수 받고는 경문 은 깍아 낼 수 없는 글 이라 여기였다. 그래서 은 경우에 따라서는 경문의 앞에다 그와 관 계있는 말로 시작하고, 혹은 경문보다 뒤에 경문의 意 義를 설명했으며, 혹은 경문에 의 거해서 그 이치를 말해 밝히었고, 어느 경우에는 경문을 섞어 넣어서 글의 다름을 맞추었으 며, 다 뜻을 따라 경문중에 그 사례가 중복된 것을 밝히고, 옛 역사의 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여 전부를 들어 거론하지 않은 것은 성인께서 중히 여겨 편수한 대목이 아니기 때문이 다. 좌구명은 노나라에 사관이 되어 몸소 널리 펼쳐 전하는 책을 읽었으니, 일마다 넓게 기 술하고 자상히 말하여, 그 글은 완만하고, 그 뜻은 심원하다. 장차 공부하는 자들로 하여금 사건 근원의 처음을 찾고 종말을 살피어 알게 하여, 일에 관계되는 작은 일을 알고, 궁극적인 것을 알게 하고, 글은 너그러워 배우는 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탐 구케 하고, 아주(포식해) 만족스런 것이어 서, 재미를 붙이어 스스로 달려 나가게 (성취케) 하는 것이다. 마치 강이나 바다의 물이 멀리 만물을 적시고, 큰 빗물이 널리 만물을 윤택케 함과 같으며, 글을 읽노라면 봄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리어, 편안하게 이치를 깨달을 수 있어 그런 후에 眞意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其發凡以言例 皆經國之常制 周公之垂法이요 史書之舊章이라 仲尼從而脩之하야 以成一經之通體하시니 其微顯闡幽라하야 裁成義類者皆據舊例而發義하고 指行事以正褒貶하고 諸稱書不書先書故 書不言不稱書曰之類皆所以起新舊하야 發大義謂之變例然 亦有史所不書하야 卽以爲義者하니 此盖春秋新意故 傳不言凡하고 曲而暢之也其經無義例하고 由行事而言則傳直言其歸趣而已非例也

 

좌씨전 무릇()이라는 말로써 시작해서 일의 를 말한 것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정 상적인 제도이요. 주공이 제정하여 후세에 남기신 법도이요. 사관이 기록하는 예부터의 법도 였다. 중니께서는 이에 따라 이것을 편수하시어 춘추 경문 전체에 통하는 體系를 이루셨으니, 좌씨는 경문에 은미함과 현달함이 널리 펼치시고 그윽이 숨기셨다.라 하여, 좌씨전은 경 문에 해박함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하고, 뜻이 깊이 알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해박하게 설명 하여 의리의 예를 정연하게 설명했다. 이것은 다 옛 역사의 예에 의거하여 義理를 분명 하게 말한 것이니, 그 사람이 행한 일의 옳고 그름을 바로 찾아내어, 선을 포창하고 악을 폄 하하는 정신을 똑바로 밝힌 것이고, 좌씨전의 썼다, 쓰지 않았다, 먼저 썼다, 그러므로 썼 다, 말하지 않았다, 칭하지 않았다, 써서 말했다.라고 말한 것들은 모두 새로운 와 예로 부터의 와 구별하여, 춘추의 대의를 밝히니, 이것들을 舊例에 대하여 變例라 이른다. 그러 나 사관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지만 공자의 춘추 의리에 의한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또한 공자의 創意的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에서 옛 기록을 고친 것이나, 사관이 원래 기록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는(), 무릇, 云云식으로 쓰지 않고서, 간곡하고도 자세히 말했다. 그리고 에 특별히 내세운 가 없이 다만 그 사람의 행한 일에 따라서만 말했으면 에서도 그 귀결만을 곧게 말한 것뿐이요. 그러니 이런 것들은 義例(褒善懲惡)에 들지 않는 非例인 것이다.

 

故 發傳之體有三하고 而爲例之情有五하니 一曰微而顯이니 文見於此而起義在彼하니 稱族尊君命舍族尊夫人梁亡城緣陵之類是也二曰志而晦이니 約言示制 推以知例參會不地與謀曰及之類是也三曰婉而成章이니 曲從義訓하야 以示大順하니 諸所諱辟璧假許田之類是也四曰盡而不汙直書其事하야 具文見意하니 丹楹刻桷天王求車齊候獻捷之類是也五曰懲惡而勸善이니 求名而亡하고 欲盖而章하니 書齊豹盜三叛人名之類是也推此五體하야 以尋經傳하고 觸類而長之하야 附于二百四十二年行事하니 王道之正人倫之紀備矣니라.

 

그러므로 좌씨 전에서 를 말하는 체재에는, 舊例, 正例 變例, 非例의 세 가지가 있 고, 경문의 범례를 설명하기 위한 실정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경문의 말은 미미 (간략)하지만 그 가 잘 드러나 있으니, 에서 드러난 글 보다 그 뜻이 글 밖에 드러났으 니, 씨족명을 칭한 것은 군주의 명을 높이는 것, 씨족명을 빼고 부인을 높이는 것, 양나라 가 망한 것, 연릉에 성을 쌓았다등의 말한 것들이 이런 것이다. 둘째는 기록은 있으나 뜻이 분명하지 않으니 경문에 간단히 전하여 그 의리 사상의 법제는 보여 지나, 추측을 하여 그 뜻 을 안다는 것이다. 參個國以上 이 회합에는 지명을 쓰지 않는다. 二個國이 도모함을 나타냄 에 자를 쓴다.등의 가 이것이다. 셋째는 바로 쓰기 거북한 내용을 돌려서 기술했으나, 글이 정연하다는 말이니, 돌려서 말했으나 지켜야 할 가르침에 따라서 신하가 순종해야할 큰 가르침을 보이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쓰기를 회피함에, 구슬을 주고 許田을 빌렸다같 은 것이 이것이다. 넷째는 어느 일을 바른 대로 모두 기록하여 굽히지 않음이니, 그 일에 대 하여 直筆을 써서, 글로 그 일을 자세히 밝히고, 의 뜻을 올바르게 드러냄이라.

기둥에 단청을 했다. 서까래에 조각을 했다. 천자인 왕이 수레를 요구했다. 제나라 군주 가 전리품을 바치었다.등은 이런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다섯째는 나쁜 사람은 징계하고 선 함을 권장한 것이니, 이름을 얻으려다가 명성을 잃고, 악을 덮어 감추려다가 오히려 그 악이 세상에 밝혀 드러남이니, 제표를 도적이라 쓴 것, 세 번 배반한 자를 기술함이 이것 이라. 이 다섯 가지 를 기본으로 삼아, 춘추의 경문과 전문을 터득하여, 같은 일을 당하여 근거를 확 장하여 그 됨을 가지고 부연하여, 춘추시대 242년간에 행해진 일들에 비춰 보니, 나라를 다 스리는 왕도의 바름과 인간들이 지켜야한 윤리의 기강이 다 구비된 것이 되느니라.

 

 

或曰春秋以錯文見義하나니 若如所倫이면 則經當有事同文異而無其義也先儒所傳皆不其然하니라 答曰春秋雖以一字爲褒貶이나 然 皆須數句以成言이라 非如八卦之爻可錯綜爲六十四也固當依傳以爲斷이라

 

어떤 이가 말하길 춘추는 글귀를 잘 맞추어 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요.라고 하니 만약 그대가 논한 바와 같다면 경문은 마땅히 같은 일인데 문장 표현이 다르더라도 다른 의리는 없는 것이니, 앞선 학자들이 전한 바는 모두 다 그렇지 않소이다. 라고 하니라. 이에 대해 나 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춘추는 비록 한 글자를 가지고 선을 포창하거나 악을 물리쳤다 할지라도, 그러나 여러 마디 말로 경문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서, 역경의 8괘의 효가 이리 저 리 어울려져 64효가 되어 진 것이 아니니, 진실로 마땅히 의 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할 것 입니다.

 

古今言左氏春秋者多矣로대 今其遺文可見者十數家大體轉相祖述하야 進不得爲錯綜經文하야 以盡其變하고 退不守丘明之傳하야 於丘明之傳有所不通이면 皆沒而不說하고 而更膚引公羊穀梁하야 適足自亂이니라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좌씨 춘추전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오늘날 이에 대해서 전해진 학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십 여 가지가 되니, 대체로 그 학설들은 다 서로 옛날 사람들 의 설을 이어받아 기술한 것들로, 진취적으로 의 글들을 이리저리 섞어서 그 다름을 터득하 지 못하였고, 그 변화의 다양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였고, 左丘明을 지킨다는 입장에서 좌씨전을 내용을 그대로 고수하지도 못한 것이다. 좌전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으 면, 다 덮어 둔 채 언급하지 않고, 공양전, 곡량전을 건성으로 겉만 끌어당겨, 다만 스스로 어 려움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預 今所以爲異하야 專修丘明之傳以釋經하야 經之條貫必出於傳하고 傳之義例總歸諸凡이라 推變例以正褒貶하며 簡二傳而去異端이어늘 盖丘明之志也其有疑錯이면 則備論而闕之하야 以俟後賢이라 然 劉子駿創通大義하고 賈景伯父子許惠卿皆先儒之美者也末有潁子嚴者하야 雖淺近이나 亦復名家故 特擧劉賈許潁之違하야 以見同異하고 分經之年與傳之年相附하야 比其義類하야 各隨而解之하야 名曰經傳集解라하니라 又別集諸例及地名譜第歷數하야 相與爲部하니 凡四十部十五卷이라 皆顯其異同하고 從而釋之 名曰釋例하야 將令學者觀其所聚異同之說釋例詳之也

 

 

(두예)가 이제 전의 학자들 다른 점을 펼쳐, 오로지 좌구명의 전문을 연구하여서 경문을 해 석하여, 경문의 일관된 條理는 반드시 글에()나타나 있고, 를 말한 는 다 凡例歸一 되어 진다. 變例를 추론하여서 포폄의 뜻을 바로 말하며, 또 공양, 곡량 두전의 글 중에 서 잘 되어진 것을 골라 취하였고, 잘못된 것은 버렸거늘, 모두 좌구명의 뜻과 부응됨이라. 만일 글에 착오가 있는 가 의심이 나면, 상세히 말하다 가도 단정하는 말을 하지 않고 남겨두 어서, 훗날에 어진 선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유자준은 처음으로 춘추 좌씨전 대의에 통달한 분이고, 가경백 父子 와 허혜경은 모두 옛날 학자 중에 훌륭한 분들이다. 그 뒤를 이 어 영자엄이란 분이 있어 비록 학술은 깊지 못했으나 그 분 또한 유명한 학자이다. 그러므로 ,, , 潁氏 등은 학설에서 다른 점을 거론하여, 서로 같거나 다른 점은 나타냈다. 그리 고 나는 춘추 경문에 표기된 과 좌씨전의 를 분별하여 양자가 서로 맞게 붙이여, 그 의리 의 내용이 경과 전 사이에 다른 점이 있는가 대비해 보아서, 각각의 글에 따라서 뜻을 해석 하여, 책이름을 경전집해라 하니라. 그리고 나는 또 모든 , 地名, 系譜의 차례, 年代등을 모 아 한 책에 담아 꾸미었는데, 무릇 40부에 권수는 15권 이었다. 모두 전해진 설의 다름과 같 음에 대해 밝혀 말하였고, 각각 내용에 따라 설명을 붙이었다. 이 책의 이름은 釋例라 하여, 장차 춘추를 공부할 학자들로 하여금 책 안에 모아 담은 것을 보아 참고가 되게 함이라. 전 해진 설의 다름과 같음은 석례에 상세히 말하고 있다.

 

或曰春秋之作左傳及穀梁無明文하니 說者以爲仲尼自衛反魯하야 脩春秋立素王하고 丘明爲素臣이라 言公羊者亦云한대 黜周而王魯危行言孫하야 以辟當時之害故 微其文하고 隱其義라하다 公羊經止獲麟하고 而左氏經終孔丘卒이라 敢問所安이라 答曰異乎余所聞이로다 仲尼曰 文王旣沒文不在茲乎此制作之本意也歎曰鳳鳥不至하고 河不出圖하니 吾已矣夫盖傷時王之政也麟鳳五靈王者之嘉瑞也어늘 今麟出非其時虛其應而失其歸하니 此聖人所以爲感也絶筆於獲麟之一句者所感而起이니 固所以爲終也

 

어떤 사람이 말하길춘추의 제작에 대해서는 좌씨전 및 곡량전에 밝힌 글이 없습니다. 좌씨 전에 대해 말하는 자는 공자께서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 가셔서 춘추를 편찬하심에 가 상적으로 덕이 있어 천자라는 관념을 갖추시었고, 좌구명은 가상적으로 천자를 돕는 신하가 되어 전을 지었던 것이오. 그리고 또 공양전을 연구하여 말하는 자가 있는데, 또한 이르기를( 공자께선 춘추를 지어) 의 왕을 천자 자리에서 내쫓고, 노나라 군주를 천자로 인정하셨지 만, 일신의 행동은 위엄이 있고, 말씀만은 겸손 하여서, 그 당시 사람들한테 오는 는 피하 셨다. 그러므로 그 글은 간략하고 그 안에 깊은 뜻이 숨겨졌다.라고 하다. 그리고 공양 전에 있는 경의 글은, 기린을 잡았다는 일로써 끝을 맺고 있는데, 좌씨전에 있는 경의 글 은, 공자께서 돌아가신 일로 끝을 맺고 있소이다. 대체 어느 것이 옳은 가를 묻는 것이오.이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주나라 문왕께서 이미 이 세상을 떠나시어 계시지 않지만, 그 어른께서 세우신 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하셨소이다. 이것이 곧 춘추를 지으신 근본정신이었소. 공자께서 탄식하시며 말씀하시길, 봉황이 나타나지 않고, 황하는 용마 그림을 지어 내보내 지 않으니, 나의 도는 이제 그만 인가 보다!라고 하셨는데,이 말씀은 곧 당시의 천자의 政事가 바르지 못한 것을 슬퍼하신 것이오. 기린, 봉황, 등의 다섯 가지 靈物은 어진 천자가 出現하는 기쁨을 알려주는 상서로운 것이거늘. 이제 기린이 나온 것은 그때가 아니므로, (기린) 감응함이 헛된 세상에서 정당히 돌아갈 곳을 잃었구나! 이게 성인 이신 공자님의 느낌이었소이다! 이렇게 느끼시어 공자께서 기린을 잡았다는 말씀의 대목에서 붓을 놓으셨음 은, 그 사실에 느끼시어 춘추의 붓을 드셨는데, 진실로 그게 끝이 됨이 마땅하오.

 

曰然則春秋何始於魯隱公인가 答曰周平王東周之始王也隱公讓國之賢君也考乎其時則相接하고 言乎其位則列國이오 本乎其始則周公之祚胤也若平王能祈天永命하고 紹開中興하고 隱公能弘宣祖業하고 光啓王室이면 則西周之美可尋이러니 文武之迹不墜是故因其歷數하야 附其行事하고 采周之舊하야 以會成王義하고 垂法將來하시니 所書之王卽平王也 所用之歷卽周正也所稱之公卽魯隱也安在其黜周而王魯乎子曰 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인저 此其義也若夫制作之文所以彰往考來하야 情見乎辭하야 言高則旨遠하고 辭約則義微이니 此理之常이오 非隱之也聖人包周身之防하니 旣作之後方復隱諱하야 以辟患非所聞也로다 子路欲使門人爲臣한대 孔子以爲欺天이라 而云仲尼素王 丘明素臣又非通論也先儒以爲制作三年文成致麟이라하니 旣已妖妄이오 又引經하야 以至仲尼卒하시니 亦又近誣據公羊컨대 經止獲麟하고 而左氏小邾射不在三叛之數故 余以爲感麟而作하시니 作起獲麟인댄 則文止於所起爲得其實이라 至於反袂拭面하시며 稱吾道窮亦無取焉이니라.

 

그 사람이 말하길,그렇다면, 춘추는 어찌하여 魯隱公에서부터 쓰기 始作했단 말인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周平王東周時代 첫째 왕이었고, 은공은 제후국인 노나라를 아우님에게 讓位하신 어진 군주였소. 그 때를 고찰한다면, 평왕의 시기와 은공의 시기는 서로 해지고, 그 지위를 말한다면, 은공은 여러 나라의 제후와 같았 으며, 그 시조를 따지자면, 즉 주공의 자손입니다. 만약에 평왕이 하늘에게 나라의 운수가 영 원토록 빌어 中興의 천자로서 옛 어진 천자의 偉業을 계승해서 훌륭한 王道를 일으키고, 은공 이 조상의 위업을 크게 떨치게 하고 周王室을 적극 도왔더라면, 西周의 좋은 정치는 다시 이 어졌을 것이니, 文王, 武王이 끼친 업적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은공 이래 年月에 따라, 행해진 일들을 그해 그 달 별로 記錄하시되, 주나라가 제정한 옛법도 를 채택해서, 王者의 대의를 두루 모아 말씀하여, 法度를 앞날에 드리워 보이신 것이니, 춘추의 처음에 王 正月이라 쓴 것은 周 平王 인 것이고, 기사에 쓰인 冊曆 은 주나라가 제정 해서 썼던 이며, 처음에 이라 칭한 것은 곧 魯隱公을 두고 서이다. 그런데 어찌 周王室을 배척하고, 노나라 군주를 천자로 삼자는 뜻이 있었단 말이오?공자께서 말씀하시길만일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東周를 위할 것이로다!라고 하셨는데 이 정신이 곧 춘추 를 지으신 의리인 것입니다. 공자께서 지으신 춘추 경문을 말할 것 같으면,과거를 명백히 하시고 미래를 헤아리게 하여서, 그 정신은 글 속에 제대로 나타나 있소이다.하는 말이 고 상하면, 그 뜻은 깊고도 원대해지고, 글의 말이 간략하면, 그 뜻이 미묘해서 이해가 힘드니, 이것이 理致正常인 것이오. 本意를 감추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성인께선 주밀하게 자신을 지킬 방책을 겸비하시니, 春秋를 지으신 뒤에, 자신에게 닥쳐올 화를 피해서 글 안에 본의를 숨기셨다는 건, 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소이다. 子路가 공자의 제자들을 공자의 신하로 삼 자 하였음에, 공자께서는 그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소이다. 그런데 공자에 대 하여 素王 云云하고, 좌구명에 대하여 素臣 云云하는 것은, 이 또한 통해질 논리가 아니오. 先儒들이 말하길,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 시기 시작한지 삼년에, 글이 다 완성되어지자 기 린이 나타났었다고 했음은, 이미 요사스럽고 망령된 말이 되었소. 그라고 춘추의 경문을 늘리 어, 공자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로 한 것, 또한 거짓말에 가깝다 말할 것이오. 이것은 공양 전에 있는 경문이 依據컨대 기린을 잡았다는 일까지로 끝을 맺고, 그리고 좌씨 춘추전에 小 邾나라 ()이 세 배반자의 숫자에 끼어지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해 明白하오. 그러므로 나는 공자께서 기린이 나타난 사실을 보시고 느끼시어 춘추를 지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춘추를 지을 생각이 기린을 잡은 것을 보시고 起因하였을 것 인데, 그 마음이 일어나게 한 사실까지 에서 끝맺음이 옳은 것을 채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께서 옷소매를 이리저리로 제치어 낯의 눈물을 씻으시고,나의 는 이제 다 되었구나! 라고 말씀하셨다는 (공양전의) 역시 취할 점이 없는 것이오.

 

原文 : 春秋左氏傳. 懸吐飜譯 : 素恩 朴香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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