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천안문 . 자금성.

천안문과 자금성

율길 2009. 10. 12. 20:22

천안문과 자금성

천안문 광장 (2009. 4. 12)

화창한 4월12일 9시 25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중국국제항공 소속 CA138 항공기는 11시에 북경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터미널을 나서니 우리 일행 12명을 마중 나온 롯데여행의 문화(文花 : 가이드)양이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대기시킨 소형 버스로 안내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에는 버드나무, 수양버드나무, 우리나라에서 사시나무와 버드나무를 접붙여 만든 은사시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다. 중간 중간에는 홍매화 나무가 붉은 꽃을 한 아름씩 안고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은 길이가 880m이고, 너비는 500m이며, 총면적은 440,000㎡로 한꺼번에 100만 명의 집회가 가능하다고 하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넓은 광장 이다. 이 광장의 남쪽에는 전문(前門)이 있고 북쪽에는 천안문, 동쪽에는 길을 건너 중국혁명역사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우리의 국회의사당)과 그 남쪽에는 모택동기념관이 있고 중앙에는 인민영웅비가 있다. 모택동 기념관에는 지금도 모택동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안치하고 시민에게 공개하면서 입장료는 받지 않고 아침 8시부터 12시 까지만 선착순으로 입장시킨다고 하는데 그 시간은 계절에 따라 변경된다고 한다.

이 광장은 1989년 6월 4일 일명 ‘천안문 사태’ 라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서 더 알려진 곳이다. 천안문에는 중앙에 모택동 사진이 걸려있고 그 왼쪽 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오른쪽에는 세계인민단결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걸려있다.

한 마디로 무척 넓은 곳이다.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북경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온 것 만 같다.

북경과 우리와는 한 시간의 시차가있다. 우리보다 북경의 시간이 한 시간 빠르다.

천안문을 나와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점심은 중국식으로 별로 내 입에

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겨우 부

추무침이 있어 요기를 할 수 있었다. 무슨 버섯인지는 몰라도 버섯종류가 많은 것 같다. 식사후 우리는 자금성으로 갔다.

자금성 (2009. 4. 12)

자금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궁궐로 현지에서는 고궁(故宮)이라 부르나 궁궐의 모든 기와가 자색(紫色)을 띠고 있으며 인간의 출입을 금(禁)한다고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明), 청(淸) 대에 24명의 황제가 정사를 보고 거주하던 황궁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완전하게 보전된 목조 건물이라고 하는데 기둥이며 중방 등은 금속관으로 싼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붉은색 칠을 했는데 틈새가 없다. 황궁의 구조는 우리나라 경복궁과 경희궁 같이 정문을 들어서면 금수교(金水橋)가 있는데 그 규모는 무척 넓고 크다. 이는 황궁의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끌어드리는 역할과 잡인의 침입을 막는 이중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1987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자금성은 면적이 72만㎡에 달하고 700여종의 건축물과 9,000개의 방이 있어, 금방 태어난 아기가 한 방에서 하루씩 머물러도 24살이 지나야 된다는 가이드의 말이 허풍은 아닌 것 같다.

 

오문(午門)

오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그 크기에 압도 된다. 8m의 높은 성벽위에 다섯 체의 누각이 내려다보고 있다. 황궁의 정 남쪽에 있다고 오(午)문이라 했다는데 황궁의 정문으로 지방의 제후들이나 외국의 사절단들도 모두 이 문을 통해서 자금성을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자금성의 입장권을 판매하고, 입장권을 검표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그래서 입장권을 사기위한 행렬로 항상 붐비고 있다.

 

오문을 들어서자 길이 3,400m 넓이 5m, 깊이 4m의 5개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이 하천은 황궁의 화재에 대비하여 인공으로 끌어들인 하천이라고 한다. 5개의 다리 중 중앙에 있는 다리는 황제만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황제인양 가운데 다리로 건너갔는데, 난간은 모두 백옥으로 만들어 졌다. 이 다리는 내금수교(內金水橋) 또는 그냥 금수교(金水橋)라 부른다. 금수교를 건너면 태화문(太和門) 광장이 있는데 이곳는 넓이가 3만㎡로, 황태자의 결혼식, 황제의 등극과 같은 행사를 치르던 곳이라 한다. 특이한 것은 자금성 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가이드의 설명은 나무 뒤에서 자객이 숨어 있다가 황제를 시해할까보아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태화문 앞 좌우에는 청동 사자상이 있는데 좌측에는 수사자상, 우측에는 암사자상으로 자금성 안에는 6개의 청동 사자상이 있다고 한다, 이 사자상은 호법신(護法神)이라고 하며 법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한다.

 

태화전(太和殿)

태화전은 명나라, 청나라를 통하여 역대 황제들이 직접 정치를 행하던 곳으로 정전의 넓이는 9칸이고 천정의 높이는 35m이고, 총 건축면적은 2,377㎡로 중국 궁전 건축의 최고라고 한다.

태화전 앞에는 좌우에 동(銅)으로 만든 사자상암 수와 거북이 상과 학의 동상이 있는데 이는 중국과 황제의 영원한 집권과 장수를 바라는 주술적인 뜻이 있다고 한다.

태화전을 돌아 뒤로 가면 보화전이 있다. 보화전 뒤에는 운용대석조(雲龍大石雕)라는 무지 무지한 옥돌에다 아홉 마리의 용을 새긴 돌이 있는데 이는 연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이란다.

그 크기에 놀라고 또한 정교하게 새긴 용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난다. 한편으로는 이 큰 돌을 운반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몇 명이나 이로 인해 죽음을 당했을까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 진다.

이 운용대석조(雲龍大石雕)는 길이 16.7m, 폭 3.07m, 두께 1.7m, 무계 약200톤의 커다란 애청석으로 원래는 북경

에서 10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운반 하는데 만도 1만 명의 인원과 1천여 필의 말을 이용해서 이곳까지 수로를 파고 수로에 물을 넣어 그 물이 겨울에 얼은 다음에 얼음위로 운반했다니 놀랄 뿐이다.

이 옥돌에 조각은 구름 속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니는 그림을 조각했다.

보화전은 문무 대신들과의 연회장소로 사용하다가 청조 중기부터는 과거 시험 장소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화전을 뒤로하고 건청문(乾淸門)을 나서면 여기서부터는 자금성의 내궁이 된다.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저궁(坤宁宮), 어화원(御花园) 에 이어 북문격인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면 자금성 관광이 끝나게 된다.

건청궁은 황제의 침실과 거실이 있는 궁으로 그 화려함에 극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곳 역시 거북이의 청동상과 학의 청동상이 있다.

사진 앞에 보이는 황금색 항아리는 방화용 물을 저장했던 것으로 청동으로 되어 있으며 겉에는 황금을 입혔으나 청나라 말기에 8개국 연합군이 모두 베껴갔다고 한다. 밑에는 겨울에 물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을 땔 수 있게 아궁이가 있다. 그 크기는 무계가 2톤이나 된다고 한다.

교태전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는 궁으로 황후가 신년 하례를 받던 곳이라 한다. 또한 황태자의 아침 하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교태전 뒤에 있는 곤저궁(坤宁宮)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위패를 모셔둔 곳이기도 하다. 곤저궁 뒤의 곤저문을 나서면 어화원으로, 여기서 부터는 나무들이 보인다. 보통 3~4백년이나 된 향나무며 각종 고목들이 역시 고궁의 역사를 말해두듯 줄지어 있다. 각종 꽃나무며 백송나무는 신비하기까지 했다.

어화원 관광으로 자금성은 대충 돌아본 것 같다. 누가 말했듯이 북경관광은 발로 한다더니, 정말 오늘 많이 걸었다. 발에서 땀이 나고 있다. 이제는 시장기까지 느껴 식당으로 직행했다. 저녁을 먹는데 음식은 전부 기름기가 너무 많으며 역시 버섯요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소화를 못할 것 같아 식당 종업원을 불러 이과두주 작은 것으로 한 병 달라고 하니 8위안이란다. 중국화폐로 8위안을 주니 술을 준다. 그래도 독한 술과 같이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또 버스를 타란다. 도착한 곳은 조양극장이다. 서커스를 본단다.

국내에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중국의 서커스다. 이미 인터넷에서 본 것이고 보니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옆에 앉은 양반은 기분 좋게 자고 있다. 서커스가 끝나고 북경 외곽에 있는 아태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