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균관 묘정비

율길 2017. 10. 21. 12:27

成均館 廟庭碑文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 幷序

 

永樂七年歲在己丑秋九月國王殿下命臣季良若曰惟我先考太祖受天明命肇造家邦定都漢陽亟建廟學所以尊先聖而重文敎也予承丕緖聿遵成憲重新廟宮旣成矣學官崔諴等請文之石垂示將來汝其筆之臣季良承命隕越退而徵其始末歲甲戌太祖旣建都其宗社朝市城郭宮室之制咸底厥宜卽謀營廟學度地於都之東北隅山止土衍水環以流厥位面陽命驪興府院君臣閔霽治之鳩工飭材經始於丁丑之三月蕆事於戊寅之七月聖哲崇宇從祀旁序學在廟後中明倫堂左右有夾引脩廊于兩夾之南左夾之東有廳有廊師生之位正錄所處無一不完規模宏敞締築堅縝凡爲屋大小以間計者九十六置田以供粢盛廩生徒復戶以應灑掃足使令廟學之事可謂備矣而火于庚辰二月其年十一月殿下卽位于松京詣學謁先聖命胄子就學歲乙酉還都親奠于先聖先師越三年丁亥正月命卽廟之舊基而新之星山君臣李稷曁中軍同知摠制臣朴子靑董役晨夕督視心計指授工師用勸四閱月而廟成崇深端大比舊有加作神廚于廟之西東西門于兩序之下加給田口田至萬餘畝口以百計者三矣用議政府左政丞臣河崙獻議躋郕沂二公於配位陞子張於十哲廟宮之制益無憾焉臣竊惟聖人之道大矣不可得而讚也雖強有言其不類於繪天地而盡日月者幾希吾夫子生於周末集群聖之大成而折衷作百王之大典而垂敎功極於化初澤流於無旣生民以來未有其盛宰予所謂賢於堯舜者其有以夫自唐以來際天蟠地廟貌相望崇祀不忒矧吾東方爰自古昔俗尙禮義服箕子八條之敎彝倫之敍典章文物之備侔擬中國吾夫子盖嘗有欲居之志矣則營建廟學興崇文敎固非他邦之比也恭惟太祖康獻大王應天順人草創洪業奄有東方定都之初卽以崇聖祀興儒術爲先盖其尊德樂道之誠出乎天性而卓然有見於出治之本源當務之爲急矣所以貽謀垂裕淑人心而壽國脈者嗚呼至哉殿下仁孝謙恭剛健睿智光紹先業臨政之暇樂觀經史每至夜分卷不釋手以極格致誠正之學以盡持盈守成之道焉求之前古盖亦絶無而僅有矣世道方亨人文宣朗一時勳親大臣百僚庶俯以至宿衛之臣莫不嚮學非我太祖右文興化育養人材而我殿下弘大前烈躬行於上以鼓舞多士作新斯民之致然歟肄業有學承祀有廟周旋登降愀然對越觀感開發勉勉循循由門而堂以求其室成德達材致君澤民者接踵而出駸駸乎三代作人之盛可驗也豈惟改觀易聽焜耀一時而已哉實我朝鮮宗社萬世之福也臣季良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於穆宣聖應時而生包羲迄周集厥大成自生民來孰盛與京赫哉崇祀周于普天矧曰箕封禮義惟先揖讓俎豆從古則然天錫太祖神聖武文昭受帝命克集大勳翼翼神都惟漢之原迺經學宮聖廟在中奠薦講肄多士景從明明我王纘緖增功緝煕聖學今古罕同有倬新宮躋祀二公元良入學國本攸隆我作我述先聖是崇人材是育風化是懿孰無秉彝而自暴棄人日進學世日趍治登三咸五刻日以俟華山嶙嶙漢水亹亹與國無疆惟聖之祀穹石琢詞于永厥視

 

묘정비문 역문

유명조선국학신묘비명병서 (有名朝鮮國學新廟碑銘幷序:)

 

영락 7년 기축년(1409) 9월에 국왕폐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국가를 새로 세우시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서, 시급히 문묘와 태학을 세우셨으니 이는 선정을 존숭하고 문교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대한 사업을 계승하여 정해진 법도에 따라 거듭 묘궁을 새롭게 단장하여 완성하였다. 학관 최성(崔誠) 등이 비석에 글을 새겨 후대에 전해 보일 것을 청하였으니, 네가 글을 짓도록 하여라.” 하시어 신 변계량이 명을 받고 황공히 물러나 그 시작과 끝을 기록 하였습니다. 갑술년(1394)에 태조가 도읍을 세우시고, 그 종사 조정과 시가 성곽 궁실의 제도가 모두 그 마땅함을 이루었습니다. 즉시 문묘와 태학을 만들 것을 도모하여 산의 맥이 그치고 땅이 넓으며 물이 둘러 흐르는 남향의 자리인 도성 동북쪽에 터를 정하고, 여흥부원군 민제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공인을 모으고 재목을 다듬어 정축년(1397) 3월에 착공하여 무인년(1398) 7월에 준공하였는데, 성인과 철인을 높은 집에 받들어 안치하고 현인을 양무(兩廡)에 받들어 안치하였습니다. 태학은 문묘의 뒤에 있으며, 가운데 명륜당이 있고 그 좌우에 협문이 있습니다. 양쪽 협간의 남쪽에 랑()을 설치하고 왼쪽 협간의 동쪽에 청()과 랑()이 있어, 스승과 학생이 머무는 곳과 정록소(正錄所)가 있어 거처해야할 곳이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규모가 크고 밝으며 건축이 치밀하고 견고하였는데 가옥의 크고 작은 칸수가 96칸입니다. 밭을 딸려 두어 자성(粢盛)을 제공하여 유생들을 먹이며, 유생들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케하여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등의 일에 응하게 하고, 사역(使役)을 담당하는 사람을 충분히 두니, 문묘와 태학의 일이 구비되었다고 할 만 하였는데 경진년(1400) 2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 임금께서 송경(松京)에서 즉위하고 태학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주자(胄子)에게 명하여 태학에서 배우도록 하였으며, 을유년(1407) 정월에 문묘의 옛터에 새롭게 중건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성산군 신()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재 박자청(朴子靑)이 역사(役事)를 밤낮으로 감독하고 지휘하여 넉달만에 문묘를 완성하니, 높고 깊으며 단아하고 웅대한 것이 옛 건물에 비하여 더욱 성대하였습니다. 묘의 서쪽에 신주(神廚)를 짓고, 양무의 아래에 동서의 문을 지었으며, 밭과 사람의 수를 추가로 제공하니 밭은 만여 무()에 이르고 사람의 수는 3백명에 이르렀습니다. 의정부 좌정승 신() 하륜(河崙)이 올린 건의를 받아들여 종성공 증자(曾子)와 술성공 자사(子思) 두분을 배위로 올리고 자장(子長)을 십철(十哲)로 올리니 묘궁의 제도에 유감이 없었습니다.

()은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위대하며 찬()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억지로 말을 만든다 할지라도 천지를 그리고 일월을 그리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공자께서 주나라 말기에 태어나 여러 성인들이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을 모아서 절충하고, 백왕(百王)의 대전(大典)을 지어 가르침을전하여, ()이 교화의 처음에 지극하였고, 은택이 무궁하게 흘러, 백성이 태어난 이래로 이보다 왕성함이 없었으니, 공자의 제자인 재여(宰予)가 이른바 요순(堯舜)보다 어질다.’ 고 한 말은 진실입니다. 당나라 이래로 넓은 천지 사이에 묘궁이 서로 바라보이고 성현을 높이는 제사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고 기자 8(八條)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떳떳한 윤리의 펼쳐짐과 전장(典章) 문물의 갖추어짐이 중국에 비할 정도이어서 공자께서 일찍이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뜻을 지니셨으니, 문묘와 태학을 건립하고 문교를 높이는 것은 진실로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큰 업을 처음으로 만들어, 문득 동방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 난 직후부터, 곧바로 성인을 존숭하여 제사지내고 유학의 도를 일으키는 것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정성은 천성에서 나왔으니, 다스림이 나오는 본원(本源)과 당무(當務)가운데 시급한 것을 헤아릴 수 있는 탁월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후세에 지혜를 남기고 넉넉함을 드리우며, 사람의 마음을 어질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오래 가게 한 원인입니다.

! 지극하도다. 전하께서 어질고 효성스럽고 겸손하고 공손하며 강직하고 세며 예지가 뛰어나시어 선대의 업을 정사를 돌보고 난 여가에 즐겨 경사(經史)를 보시니, 매양 밤중이 되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여 격물(格物)과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학문을 지극히 하고 가득함을 유지하며 선군(先君)의 성법(成法)을 지키는 도를 다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세도(世道)가 바야흐로 형통하고 인문이 찬란하여 한때의 훈신과 척신등 대신과 모든 벼슬아치 및 관리로부터 밤에 숙직하며 지키는 말단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 태조가 문()을 숭상하고 교화를 흥기(興起)시키며 인재를 길러 내었고, 우리 임금이 지난시대의 큰 공적을 널고 크게 하여 몸소 임금의 자리에서 실천함으로써 많은 선비를 고무시키고, 백성을 진작하여 새롭게 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업을 익힘에 태학이 있고, 제사를 받듦에 묘우가 있습니다. 두루 돌고, 오르고 내림에 조심스럽게 신명을 다하였습니다. 덕을 이루고 재주에 통달하며, 어진 임금이 되게 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자들이 계속 이어져 나왔습니다. 이리하여 점점 3(三代)에서 인재를 양성하던 성대함을 미험(微驗)하게 되엇습니다. 이것이 어찌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한때를 찬란하게 할 뿐이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조선의 종묘사직에 있어 만세의 복입니다. 신 계량(季良)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치니 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름답고 훌륭하신 문선왕께서 시대에 응하여 태어나 포희씨(包羲氏:伏羲氏)로부터 주나라에 이르기 까지 크게 이루어진 바를 모았으니, 인류가 생긴 이래로 누가 이보다 더 성대하고 빛날 수 있겠는가? 문선왕 공자를 숭모하는 제사가 온 세상에 두루 미치었으니 하물며 기자(箕子)의 봉국(封國)인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랴! 예의를 우선으로 하며 겸허하고 공손하며 제사를 모시는 풍속이 예로부터 있었다. 하늘이 태조에게 신() () () ()을 내려 주고 있으나, 천제(天帝)의 명을 밝게 받아 능히 위대한 공적을 쌓았다. 웅장한 신도(新都)는 바로 한수(漢水)의 언덕으로 이곳에 학궁(學宮)을 만드니 성묘(成廟)가 중앙에 있다. 존천(尊薦)하고 강습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늘 따랐다.

영명하신 우리 임금이 서업(緖業)을 이어 공()을 보태고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여 빛내시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일은 드물었다. 높다란 신묘(神廟)에 이공(二公)을 올려 제사지내고 왕세자가 입학하게 하니, 나라의 근본이 융성하게 되었다. 내가 짓고 내가 기술하니 선성(先聖)이 이에 높아지고 인재가 이에 육성되었으며 풍화(風化)가 이에 아름다워졌다. 누가 아름다운 본성이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겠는가? 사람이 날마다 배우는 곳으로 나아가고, 세상이 나날이 다스려져 삼황오제의 태평성대를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리게 되었다. 화산(華山)이 우뚝하고 한수(漢水)가 도도히 흐르니, 국가와 더불어 영구히 성인을 제사지낼 것이다. 이에 큰 돌에 글을 새겨 길이 볼 수 있게 하는 바이다.


19641110일 사적 제143호 지정

중종 6(1511)에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훼손되어 인조 4(1626)에 변계량(卞季良)의 옛글에 이정구(李廷龜)에게 비음(碑陰)을 기술케 하고, 이를 이홍주(李弘冑)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