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묘정비
【成均館 廟庭碑文】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 幷序
永樂七年歲在己丑秋九月。國王殿下命臣季良若曰。惟我先考太祖受天明命。肇造家邦。定都漢陽。亟建廟學。所以尊先聖而重文敎也。予承丕緖。聿遵成憲。重新廟宮。旣成矣。學官崔諴等請文之石。垂示將來。汝其筆之。臣季良承命隕越。退而徵其始末。歲甲戌。太祖旣建都。其宗社朝市城郭宮室之制。咸底厥宜。卽謀營廟學。度地於都之東北隅。山止土衍。水環以流。厥位面陽。命驪興府院君臣閔霽治之。鳩工飭材。經始於丁丑之三月。蕆事於戊寅之七月。聖哲崇宇。從祀旁序。學在廟後。中明倫堂。左右有夾引脩廊。于兩夾之南。左夾之東。有廳有廊。師生之位。正錄所處。無一不完。規模宏敞。締築堅縝。凡爲屋大小。以間計者九十六。置田以供粢盛廩生徒。復戶以應灑掃足使令。廟學之事。可謂備矣。而火于庚辰二月。其年十一月。殿下卽位于松京。詣學謁先聖。命胄子就學。歲乙酉還都。親奠于先聖先師。越三年丁亥正月。命卽廟之舊基而新之。星山君臣李稷曁中軍同知摠制臣朴子靑董役。晨夕督視。心計指授。工師用勸。四閱月而廟成。崇深端大。比舊有加。作神廚于廟之西。東西門于兩序之下。加給田口。田至萬餘畝。口以百計者三矣。用議政府左政丞臣河崙獻議。躋郕,沂二公於配位。陞子張於十哲。廟宮之制。益無憾焉。臣竊惟聖人之道。大矣。不可得而讚也。雖強有言。其不類於繪天地而盡日月者幾希。吾夫子生於周末。集群聖之大成而折衷。作百王之大典而垂敎。功極於化初。澤流於無旣。生民以來。未有其盛。宰予所謂賢於堯舜者。其有以夫。自唐以來。際天蟠地。廟貌相望。崇祀不忒。矧吾東方。爰自古昔。俗尙禮義。服箕子八條之敎。彝倫之敍。典章文物之備。侔擬中國。吾夫子盖嘗有欲居之志矣。則營建廟學。興崇文敎。固非他邦之比也。恭惟太祖康獻大王應天順人。草創洪業。奄有東方。定都之初。卽以崇聖祀興儒術爲先。盖其尊德樂道之誠。出乎天性。而卓然有見於出治之本源。當務之爲急矣。所以貽謀垂裕。淑人心而壽國脈者。嗚呼至哉。殿下仁孝謙恭。剛健睿智。光紹先業。臨政之暇。樂觀經史。每至夜分。卷不釋手。以極格致誠正之學。以盡持盈守成之道焉。求之前古。盖亦絶無而僅有矣。世道方亨。人文宣朗。一時勳親大臣百僚庶俯。以至宿衛之臣。莫不嚮學。非我太祖右文興化。育養人材。而我殿下弘大前烈。躬行於上。以鼓舞多士。作新斯民之致然歟。肄業有學。承祀有廟。周旋登降。愀然對越。觀感開發。勉勉循循。由門而堂。以求其室。成德達材。致君澤民者。接踵而出。駸駸乎三代。作人之盛。可驗也。豈惟改觀易聽。焜耀一時而已哉。實我朝鮮宗社萬世之福也。臣季良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於穆宣聖。應時而生。包羲迄周。集厥大成。自生民來孰盛與京。赫哉崇祀。周于普天。矧曰箕封。禮義惟先。揖讓俎豆。從古則然。天錫太祖。神聖武文。昭受帝命。克集大勳。翼翼神都。惟漢之原。迺經學宮。聖廟在中。奠薦講肄。多士景從。明明我王。纘緖增功。緝煕聖學。今古罕同。有倬新宮。躋祀二公。元良入學。國本攸隆。我作我述。先聖是崇。人材是育。風化是懿。孰無秉彝。而自暴棄。人日進學。世日趍治。登三咸五。刻日以俟。華山嶙嶙。漢水亹亹。與國無疆。惟聖之祀。穹石琢詞。于永厥視。
【묘정비문 역문】
유명조선국학신묘비명병서 (有名朝鮮國學新廟碑銘幷序:)
영락 7년 기축년(1409) 9월에 국왕폐하께서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국가를 새로 세우시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서, 시급히 문묘와 태학을 세우셨으니 이는 선정을 존숭하고 문교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대한 사업을 계승하여 정해진 법도에 따라 거듭 묘궁을 새롭게 단장하여 완성하였다. 학관 최성(崔誠) 등이 비석에 글을 새겨 후대에 전해 보일 것을 청하였으니, 네가 글을 짓도록 하여라.” 하시어 신 변계량이 명을 받고 황공히 물러나 그 시작과 끝을 기록 하였습니다. 갑술년(1394)에 태조가 도읍을 세우시고, 그 종사 ・ 조정과 시가 ・ 성곽 ・ 궁실의 제도가 모두 그 마땅함을 이루었습니다. 즉시 문묘와 태학을 만들 것을 도모하여 산의 맥이 그치고 땅이 넓으며 물이 둘러 흐르는 남향의 자리인 도성 동북쪽에 터를 정하고, 여흥부원군 민제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공인을 모으고 재목을 다듬어 정축년(1397) 3월에 착공하여 무인년(1398) 7월에 준공하였는데, 성인과 철인을 높은 집에 받들어 안치하고 현인을 양무(兩廡)에 받들어 안치하였습니다. 태학은 문묘의 뒤에 있으며, 가운데 명륜당이 있고 그 좌우에 협문이 있습니다. 양쪽 협간의 남쪽에 랑(廊)을 설치하고 왼쪽 협간의 동쪽에 청(廳)과 랑(廊)이 있어, 스승과 학생이 머무는 곳과 정록소(正錄所)가 있어 거처해야할 곳이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규모가 크고 밝으며 건축이 치밀하고 견고하였는데 가옥의 크고 작은 칸수가 96칸입니다. 밭을 딸려 두어 자성(粢盛)을 제공하여 유생들을 먹이며, 유생들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케하여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등의 일에 응하게 하고, 사역(使役)을 담당하는 사람을 충분히 두니, 문묘와 태학의 일이 구비되었다고 할 만 하였는데 경진년(1400) 2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 임금께서 송경(松京)에서 즉위하고 태학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주자(胄子)에게 명하여 태학에서 배우도록 하였으며, 을유년(1407) 정월에 문묘의 옛터에 새롭게 중건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성산군 신(臣)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재 박자청(朴子靑)이 역사(役事)를 밤낮으로 감독하고 지휘하여 넉달만에 문묘를 완성하니, 높고 깊으며 단아하고 웅대한 것이 옛 건물에 비하여 더욱 성대하였습니다. 묘의 서쪽에 신주(神廚)를 짓고, 양무의 아래에 동서의 문을 지었으며, 밭과 사람의 수를 추가로 제공하니 밭은 만여 무(畝)에 이르고 사람의 수는 3백명에 이르렀습니다. 의정부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이 올린 건의를 받아들여 종성공 증자(曾子)와 술성공 자사(子思) 두분을 배위로 올리고 자장(子長)을 십철(十哲)로 올리니 묘궁의 제도에 유감이 없었습니다.
신(臣)은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위대하며 찬(撰)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억지로 말을 만든다 할지라도 천지를 그리고 일월을 그리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공자께서 주나라 말기에 태어나 여러 성인들이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을 모아서 절충하고, 백왕(百王)의 대전(大典)을 지어 가르침을전하여, 공(功)이 교화의 처음에 지극하였고, 은택이 무궁하게 흘러, 백성이 태어난 이래로 이보다 왕성함이 없었으니, 공자의 제자인 재여(宰予)가 이른바 ‘요순(堯舜)보다 어질다.’ 고 한 말은 진실입니다. 당나라 이래로 넓은 천지 사이에 묘궁이 서로 바라보이고 성현을 높이는 제사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고 기자 8조(八條)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떳떳한 윤리의 펼쳐짐과 전장(典章) 문물의 갖추어짐이 중국에 비할 정도이어서 공자께서 일찍이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뜻을 지니셨으니, 문묘와 태학을 건립하고 문교를 높이는 것은 진실로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큰 업을 처음으로 만들어, 문득 동방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 난 직후부터, 곧바로 성인을 존숭하여 제사지내고 유학의 도를 일으키는 것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정성은 천성에서 나왔으니, 다스림이 나오는 본원(本源)과 당무(當務)가운데 시급한 것을 헤아릴 수 있는 탁월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후세에 지혜를 남기고 넉넉함을 드리우며, 사람의 마음을 어질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오래 가게 한 원인입니다.
아! 지극하도다. 전하께서 어질고 효성스럽고 겸손하고 공손하며 강직하고 세며 예지가 뛰어나시어 선대의 업을 정사를 돌보고 난 여가에 즐겨 경사(經史)를 보시니, 매양 밤중이 되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여 격물(格物)과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학문을 지극히 하고 가득함을 유지하며 선군(先君)의 성법(成法)을 지키는 도를 다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세도(世道)가 바야흐로 형통하고 인문이 찬란하여 한때의 훈신과 척신등 대신과 모든 벼슬아치 및 관리로부터 밤에 숙직하며 지키는 말단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 태조가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를 흥기(興起)시키며 인재를 길러 내었고, 우리 임금이 지난시대의 큰 공적을 널고 크게 하여 몸소 임금의 자리에서 실천함으로써 많은 선비를 고무시키고, 백성을 진작하여 새롭게 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업을 익힘에 태학이 있고, 제사를 받듦에 묘우가 있습니다. 두루 돌고, 오르고 내림에 조심스럽게 신명을 다하였습니다. 덕을 이루고 재주에 통달하며, 어진 임금이 되게 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자들이 계속 이어져 나왔습니다. 이리하여 점점 3대(三代)에서 인재를 양성하던 성대함을 미험(微驗)하게 되엇습니다. 이것이 어찌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한때를 찬란하게 할 뿐이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조선의 종묘사직에 있어 만세의 복입니다. 신 계량(季良)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바치니 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아름답고 훌륭하신 문선왕께서 시대에 응하여 태어나 포희씨(包羲氏:伏羲氏)로부터 주나라에 이르기 까지 크게 이루어진 바를 모았으니, 인류가 생긴 이래로 누가 이보다 더 성대하고 빛날 수 있겠는가? 문선왕 공자를 숭모하는 제사가 온 세상에 두루 미치었으니 하물며 기자(箕子)의 봉국(封國)인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랴! 예의를 우선으로 하며 겸허하고 공손하며 제사를 모시는 풍속이 예로부터 있었다. 하늘이 태조에게 신(神) ・ 성(聖) ・ 무(武) ・ 문(文)을 내려 주고 있으나, 천제(天帝)의 명을 밝게 받아 능히 위대한 공적을 쌓았다. 웅장한 신도(新都)는 바로 한수(漢水)의 언덕으로 이곳에 학궁(學宮)을 만드니 성묘(成廟)가 중앙에 있다. 존천(尊薦)하고 강습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늘 따랐다.
영명하신 우리 임금이 서업(緖業)을 이어 공(功)을 보태고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여 빛내시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일은 드물었다. 높다란 신묘(神廟)에 이공(二公)을 올려 제사지내고 왕세자가 입학하게 하니, 나라의 근본이 융성하게 되었다. 내가 짓고 내가 기술하니 선성(先聖)이 이에 높아지고 인재가 이에 육성되었으며 풍화(風化)가 이에 아름다워졌다. 누가 아름다운 본성이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겠는가? 사람이 날마다 배우는 곳으로 나아가고, 세상이 나날이 다스려져 삼황오제의 태평성대를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리게 되었다. 화산(華山)이 우뚝하고 한수(漢水)가 도도히 흐르니, 국가와 더불어 영구히 성인을 제사지낼 것이다. 이에 큰 돌에 글을 새겨 길이 볼 수 있게 하는 바이다.
◈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 지정
◈ 중종 6년(1511)에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훼손되어 인조 4년(1626)에 변계량(卞季良)의 옛글에 이정구(李廷龜)에게 비음(碑陰)을 기술케 하고, 이를 이홍주(李弘冑)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