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일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의 풍신수길이 이끄는 30만 명의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로 상륙하여 동래성의 송상현 목사가 전사 하면서 진주성의 김시민 목사를 제외하고, 전국의 모든 지방 현관들이 도망을 가고 충주에서 신립장군이 이끄는 관군이 배수의 진으로 무너지면서 일본군은 밀물처럼 서울을 향해 북진하였고, 선조왕은 피난가기에 급급하여 의주까지 몽진하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명나라에서는 자기 나라에서 전쟁을 하는 것 보다는 조선 땅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이여송으로 하여금 지원병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지원해 줌으로써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면서 명나라를 치겠다는 일본군을 조선에서 막음으로 막대한 국가적 이득을 얻을 심산으로 파병을 하였는데,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의기양양하여 일본군을 몰아 내려오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보니 이여송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구태여 죽기 살기로 일본군을 쫒아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저 시간이나 끌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생색이나 내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낮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결전을 포기하고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시켰던 것이다.
이때, 이여송은 철저하게 조선을 배제한 가운데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별렸던 것이다. 그런대도 조선의 조정과 백성들은 명나라 군사가 와서 일본군을 몰라낼 것이라고 기대가 컸던 것이다. 심지어는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에도 참고, 오히려 협조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까지 되었다.
우리 관군과 의병들은 전국에서 일본군을 보기만 하면 기습을 하고, 군량의 운송을 마고,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이여송에게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본군을 공격하면 어쩌란 말이냐고 따지기까지 하여, 이여송은 우리 조정에 권율장군을 벌하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이나 명나라 군대는 모든 군량미를 조선에서 조달하게 됨으로,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되면서 백성들의 원성은 점점 높아져 가기만 하였다.
강화협상에서 일본은 명나라 심유경에게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호남·북도, 경상남·북도 및 충청도를 일본의 관할(管轄)로 달라는 조건이니, 심유경이나 이여송이 선뜻 허락 할 수 없는 사항이고 보니, 시간만을 끌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우리 백성들만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결국은 정유(丁酉)재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던 강화협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고 만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이었다고 보아야 한다.